불교 수행의 목표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닙바나이다.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실천하는 수행정진의 인연이 깊어질수록 분별하는 마음이 점점 녹아서 평정심에 가까워진다. 최소한 입류지의 경계에만 이르러도 분별하는 마음은 아주 미세해지기 마련인데, 하물며 완전한 깨달음의 경계에 이른 수행자가 ‘자아’를 전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붓다의 일대시교는 바로 계·정·혜 삼학(사성제)을 닦는 것이다.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고 청정범행을 드러내시고 법을 설하신다. 그러면 당시의 수행자가 믿음을 내서 출세간의 길을 가는 자들에게 여래는 반드시 지계를 설한다. “비구들이여, 계를 지키고 계를 구족한자는 ‘내게 후회가 없기를’하는 의도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계를 지키고 계를 구족한자에게 후회가 없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수행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의도적인 생각을 할 필요 없이 명지와 해탈·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붓다의 수행은 몸과 마음의 편안함을 통해 행복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물질적인 법과 정신적인 법이 편안해 질 때 그 때 발현되는 것이 행복인데, 그렇기 때문에 더 편안하고 더 고요한 그런 상태에서 삼매에 드는 것이다. 세간에서는 보통 흥분되어 있는 그런 상태를 행복이라 할 수 있지만 붓다가 말하는 수행을 통한 행복과는 차이가 있다.
붓다의 수행과 지계의 실천을 통해 수행자가 삼매의 법에 들 때에는 의도적인 생각들을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법을 따라서 법이 생기기 때문에 그 앞의 법이 인연이 되어서 그 뒤에 법이 이어져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의도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법을 따라 법이 생기는 것이지(法性) 내가 의도해서 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수행과 계율을 살피고자 한다.